칠흑같이 어두운 봉건시대에 한줄기 빛을 남기고 사라져 간 인물, 다산 정약용 선생은 시대적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죄인이 되어 겨우 목숨만을 부지한 채 강진 먼 바닷가로 유배를 당해 18년간을 중죄인으로 지내게 된다.
백절불굴의 의지로 수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지금까지 민족 최대의 학자이자 사상가로 우뚝 서 있다
다산선생의 유배지였던 강진땅 만덕산 중턱 다산초당에서 그의 학문의 결실을 보게되었으며 목민심서를 비롯한 수많은 저술이 이루어졌다. 사실 강진은 선생의 4번째 유배지이자 마지막 유배지가 되었다.
선생의 "다신계절목"에서 " 강진읍내에서 살았던 게 8년이고 다산(초당)에서 살았던게 11년째"라고 했으니 대부분의 유배생활은 강진이라고 할 것이다
남파랑길 83코스는 강진만과 탐진강이 만나는 구(舊) 목리교를 출발, 강진만 생태공원 갈대숲길을 지나고 남도유배길에서 만나는 백련사와 다산초당 그리고 석문공원에서 도암읍으로 이어지는 18km의 역사와 문화와 자연을 골고루 체험할 수 있는 명품구간이다. 소요시간 5시간
83코스가 시작되는 구 목리교는 한때 강진군 삼신리와 목리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으나 (신)목리교에 자리를 물려준 이후 현재는 사람만 통행가능한 다리가 되었다. 한마디로 구 목리교는 옛날 목리교라는 뜻이다
구 목리교를 출발한 남파랑길은 강진만 생태공원 갈대숲 사이 데크길로 이어진다.
갈대숲 너머로 어제 지나온 백조다리가 보인다.
강진만의 진짜 주인은 살아 있는 자연이다. 끝없이 펼쳐진 갈대숲과 풍요롭고 찰진 갯벌,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갈대숲사이 데크길은 이런 자연에 덧붙여진 인공의 흔적이다. 그 흔적은 갈대숲이 있기에 아름답다. 그곳에 기대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체는 또 어떤가..
자세히 관찰하면 할 수록 짱뚱어가 얼마나 다양한 재주를 많이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데크길위에서 바라보는 짱뚱어는 사람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다양한 행동을 한다. 물고기가 물고기 아닌체 하기도 한다
배를 뒤집고 폴짝 뛰어오르는가 하면 엉금엉금 기는 모습도 보여준다. 때로는 폴짝 뛰어 하늘로 날으기도 하고 적이 나타나기라도 하면 바람같이 갯펄구멍으로 사라진다.
저보다 몸집 작은 놈이 영역을 침범하면 쏜살같이 달려들어 끝까지 쫒아 내고, 몸집이 비슷하면 입을 크게 벌려 위협한다
재주많은 이놈은 맛까지 좋아 옛부터 찜과 구이, 짱뚱어탕 등 남도사람들은 지금도 혹은 별미로, 혹은 보양식으로 많이 먹고 있으니 짱뚱어.. 보물임이 틀림없다..
이곳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존재인지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강진만 찰진 갯벌과 숲에 기대어 살고 있는지 짱뚱어와 비상하는 철새만 보아도 대번에 알 수 있다.
강진만 생태공원 홈페이지 보다 더 상세하게 설명할 수 없어 이를 인용한다
"다양한 생명이 살아 숨쉬는 청정지역 강진만! 생태체험과 힐링의 명소로 거듭납니다.
탐진강 하구와 강진만이 만나는 지역을 중심으로 좌우로 넓게 펼쳐진 20만평의 갈대군락지는 천연기념물 201호인 큰고니를 비롯하여 각종 철새 집단들의 서식지이며, 1131종에 이르는 다양한 생물이 갯벌과 어울려 강진만 갈대숲을 지키고 있습니다"
"강진만생태공원은 탐진강과 강진만이 만나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둑이 없는 열린 하구로 자연적인 기수역이 넓게 형성되고,하구 습지에 인접한 농경지, 산지, 소하천 등의 생태환경이 양호하여 다양한 생태자원이 풍부하게 서식하고 있습니다."
강진만 생태공원 갈대숲은 생태도시 남포마을을 곁에 두고 데크를 따라 길게 이어지다 배드리공원을 지나 방조제 둑으로 올라선다. 강진만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과 청명한 기운이 발걸음을 절로 가볍게 한다.
남도 유배길은 강진만을 따라 자전거도로로 길게 이어진다. 지금은 썰물시간, 찰진 갯벌에 큰고니, 청동오리, 기러기 등 겨울철새들이 한마리 두마리 모여들더니 제법 무리를 지어 먹이를 찾고 있다.
갯벌과 수초사이를 헤집던 큰 고니가 날개짓하며 한가로이 떠 있는 강진만에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남파랑길과 다산오솔길은 서로 다른 길이다. 남파랑길은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거쳐 석문공원으로 안내하는 탈속의 길이지만 다산오솔길은 일부 중복된 구간을 제외하고 강진5일장을 거쳐 김영랑 생가로 이어지는 세속의 길이다.
강진만 제방 해창철새 도래지를 벗어난 길은 천년고찰 백련사로 이어진다
다산과 바람과 꽃이 있는 사색의 남도 명품길을 걸어가는 내내 다산선생의 굴곡진 삶과 그가 살았던 시대의 아픔을 생각하며 삶의 가치과 의미를 되새겨본다.
길은 남도풍광과 만덕산 아래 너른 들판을 품으며 백련사로 접어든다
늘푸른 동백숲과 발아래 펼쳐지는 강진만 구강포를 바라보며 우뚝 서있는 백련사는 다산선생과 혜장스님의 우정이 살아 있는 천년고찰이다.
"우연찮은 해우에 깊은 시름 다 잊다가
헤어지면 마음아파 그저 생각뿐인데
들녁 절간 찾아 껄껄대는 웃음속에 불법을 묻는다"(혜장스님이 다산선생에게 보낸 편지)
두사람은 만나자 마자 나이와 종교와 시대적 장애를 넘어 곧바로 애틋한 우정을 나눌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백련사는 넓은 차밭과 천년기념물로 지정된 동백숲이 유명하다. 빨간 동백이 뚝뚝 떨어지는 계절이 되면 땅에 떨어져 온통 붉은 꽃무더기로 수놓은 풍경을 보러 백련사를 찾는다고 한다
유홍준선생은 그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백련사에 오르면 반드시 대웅전 기둥에 기대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던지, 스님의 용서를 받고 만경루에 올라 누마루에 앉아 창밖을 내다 보아야 이절의 참맛을 알게 된다"고 했다.
만덕산 산자락에서 구강포로 이어지는 평온한 풍광을 끌어난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백련사 절간의 참맛을 느끼지 못하고 백련사를 떠난다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뭐 그런 대회가 다 있겠냐 싶지만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가는 길 숲이 숲길 장려상을 받았다고 한다
숲길 주변에 수백년 동백을 비롯하여 차나무와 후박나무 등이 자생하는 숲길은 역사와 풍경과 문화가 함께 하는 산책로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명불허전 ! 백련사를 벗어나자 마자 마주한 가을빛 단풍이 시선을 압도한다.
사소한 번민 쯤은 단번에 날려버릴 것같은 풍경이 길을 따라 이어진다
만덕산 백련사 차밭에 서서 강진만 구강포를 내려다 본다.
백련사는 조선시대 차문화의 부흥을 직접 경험한 사찰이기도 하다.
그 중심에 혜장선사와 초의선사가 있고 다산선생과 혜장선사와의 종교를 초월한 우정 또한 차를 매개로 하여 싹트기 시작했으니 틀린말도 아니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 1km 남짓..천천히 걸어도 20분이면 충분한 숲길은 다산과 혜장선사가 함께 거닐며 수많은 이야기를 남긴 유서깊은 길이다. 목민심서도 아마 이길의 사색에서 탄생한 역작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산동암은 선생의 글자를 모아 집자해서 만들었다고 하며 보정산방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추사체로 알려져 있다
유홍준 선생의 표현에 의하면 다산선생의 글씨는 "해맑은 느낌이 마치 천고의 무공해 글씨체 같기도 하고, 술에 곯아 떨어진 다음날 아침 밥상에 나온 북어국 백반 같다"고 했으며, 추사 김정희의 글씨는 박규수의 말을 빌어 "신기가 오가는 듯하고 조수가 넘나드는 듯하다"했으니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들만이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산 선생은 1801년 지금의 포항 장기에서 유배를 시작으로 강진땅 만덕산 중턱 다산초당에서 거의 18년을 머무르다 1819년 해배되어 집으로 돌아간다. 이름이 초당이니 초가집이 맞겠지만 다산유적보존회에서 지금처럼 기와로 집을 짓고 다산초당이라고 하였다. 다산 생전의 오막살이가 돌아가신 후 기와집을 지어 드린 것이다
유배에서 풀려나고 3년이 되던 해 선생은 자찬묘지명을 지었는데 글속에 다산 초당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무진년 봄에 다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축대를 쌓고 연못을 파기도 하고 꽃나물 벌여 심고 물을 끌어다 폭포를 만들기도 했다. 동서로 두 암(庵)을 마련하고 장서 천여권을 쌓아 두고 저서로서 스스로 즐겼다. 다산은 서쪽에 위치한 곳인데 처사 윤단이 산정이다. 석벽에 "丁石"두 자를 새겼다" -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인용-
정인보 선생은 다산을 "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기 대학자"로 한마디로 표현했다.
수많은 저술에도 "우리는 폐족이다" 폐족이 글을 읽지 않고 몸을 바르게 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구실을 하랴"고 하며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으며, 아내가 보내준 치마를 오려 장첩을 만들어 딸을 위해 그림과 글씨를 쓰고 딸에게 주었던 따뜻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다산초당 왼쪽 돌계단을 따라 스무남은 걸음을 옮겨가면 넓은 바위에 새겨놓은 "丁石"과 연못은 유배시절의 선생이 남겨놓은 유이한 유적이다.
다산선생의 거처였던 동암을 지나 천일각을 오른다. 유배시절에는 없던 건물이다. 가족을 향한 그리움을 달래고 유배생활에 지친 마음을 씻어내기에 더 없이 좋은 장소였을 것이다.
다산초당을 지나 귤동마을로 내려서는 언덕배기 비탈에 다산의 외가쪽 친척인 윤종진의 무덤이 있는데 그곳에 세워진 석상이 특이하다. 왕방울같은 눈과 넓은 볼과 큰 코, 얼굴 길이만큼 큰 귀가 인상적인 석인상이다.
다산초당을 내려서서 귤동마을로 접어든다. 유홍준 선생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 아담하고 정감어린 마을이었는데 잘생긴 한옥들이 들어서면서 아련한 분위기를 다시 찾을 수 없게 되었다"며 아쉬워한 바로 그 마을이다
남도명품길 인연의 길은 마점마을을 지나고 작은 산을 넘어 석문공원으로 이어진다
남도땅 소금강으로도 불리는 석문공원은 석문(石門)이라는 이름대로 영겁의 시간과 바람이 조각한 기암괴석 바위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구름다리가 만덕산과 석문산을 연결한다. 머리에는 소나무를 이고 하얀 속살을 드러낸 기암괴석 바위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남도땅 소금강이라는 표현이 전혀 부족하지 않다
길은 출렁다리를 건너 석문산을 넘어 끊길 듯 이어지는 돌계단과 흙길을 따라 도암으로 발길을 옮긴다
석문산을 내려서서 도암으로 들어간다.
남파랑길 83코스는 도암면 도암농협에서 끝이난다.
끝으로 다산의 시한 수를 감상하며 인간의 세상사가 덧없음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만 않으면 뒷사람의 발걸음이 끓이지 않음을 느껴보도록 하자
山樓夕坐(해지는 산정의 누각에 앉아)
저녁 누각엔 피리소리 그치고 갈가마귀 날아들어
외로이 마당에 서서 이슬꽃 바라보네
바람 스치는 대숲에 달빛이 부서지고
넘어진 국화꽃이 비 온 뒤에 다시 피네
종묘에 떡 올리던 서울 생각 간절하고
막걸리로 이웃 찾던 시골집이 부럽구나
엊그제 한양성에 살던 이 몸이
어찌하여 하늘 끝에 밀려왔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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